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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랜튼(M.F.Scranton)
출생지 / -
스크랜튼(M.F.Scranton) 1832~1909
감리교 여선교사. 이화학당의 창립자로서 그녀 나이 52세때 아펜젤러(H.G.Appenzeller) 내외와 1885년 6월 20일에 학교에 들어왔다.
아홉채의 초가집을 사서 헐고 그 자리에 교사(校舍)를 짓고 학생들을 모으기 시작하여 고종(高宗) 24년(1887년)에 이화학당이란 명칭으로 7명의 학생에게 교육하였으며, 광무 8년(1904년)에 이화여학교로 고치고, 1910년 4월에 대학과를 설치하여 1914년에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다. -
이동인
출생지 / -
이동인 (1849~1881)
조선왕조 말기의 개화승으로 원래는 동래(東來) 범어사(梵魚寺) 출신이었으나 주로 봉원동에 있는 봉원사(奉元寺)에 기거했다고 한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더 명치유신(明治維新) 후의 일본의 발전상에 관심을 가지고 밀항하여 처음 일본 시찰에 나선 개화파의 선구자이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그가 기안해 둔 초고를 기준으로 하여 조약을 이룩하는 등 소장 정치가로 외교에 공헌한 바 컸다. -
언더우드(H.G.Underwood)
출생지 / -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1885년 5월 5일 제물포에 도착, 서울에 들어와 의사 알렌의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설립한 광혜원(廣惠院)의 학생들에게 물리 화학을 가르쳤다.
1915년 3월에 경신학교를 세우고 여기에 대학부를 설치하자 1917년 4월 7일 조선총독부는 대학이 아닌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내렸으니 이것이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전신이다. -
민영환
출생지 / -
민영환 (1861~1905)
한말의 문신으로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 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여 자결하였다.
1946년 20월에 충정로 동명(洞名)을 붙일 때 시호인 충정공을 따서 정했다. -
서재필
출생지 / -
서재필 (1866~1951)
전라남도 보성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며, 정부 예산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지금의 영천동에 있었던 모화관(慕華館)을 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사용하였으며 또한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